민세리 베를린훔볼트대학교 재활특수교육학 박사과정
‘학교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와 규범이 모범적으로 실천되는 학습의 장(場)이어야 한다.’
(2018년 교육부장관회의 결의 내용)
독일은 민주주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나라이다. 바이마르 공화국(1918년~1933년) 때 최초로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으나 이후 집권한 히틀러의 나치정당(1933년~1945년)은 민주주의를 몰락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민주주의는 서독에만 정착했으며, 1990년 통일 이후 비로소 독일 전체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게 된다. 독일은 특히 나치 역사에 대한 깊은 후회와 반성을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를 재정립하는 노력을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노력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학교에서도 그대로 실현된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는 교과 내외 영역에서 다양하게 실현되는데, 대표적으로 학생자치활동이 있다. 학생자치활동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운영하는 교과외 활동으로, 무엇보다도 학교와 학급 차원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사결정 참여는 학생의 장애 유무를 떠나 학생 인권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본 글에서는 학생자치활동의 여러 형태 중 ‘의사결정 참여‘에 초점을 두고, 독일 특수교육대상자들의 학생자치활동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일의 학생자치활동은 각 연방주 교육법(또는 학교법)에 법적 근거를 둔다. 연방주 교육법은 장애 유무를 떠나, 특수학교·일반학교 구분을 떠나 모든 학생과 학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학교법(Berliner Schulgesetz)에 따른 학생자치활동 구조 및 의사결정 참여 방식은 <그림 1>과 같다.
우선 학급 차원에는 학급대표(Klassensprecher)가 있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각 반마다 학급대표 2명이 선출된다. 학급대표 2명은 직책상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에 있으며, 학급 내 다양한 자치활동 외에도 학급담임교사가 주도하는 학급 협의회(Klassenkonferenz: 학급 내 교육·수업 전반에 대한 협의회)에 참석할 의무가 있다.
<그림 1> 교내 학생자치활동 구조
전체 학생을 대표하는 학생 위원회(Gesamtschülervertretung)는 학급대표들로 구성된 학생자치기구이다.
학생위원회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전교 회장(Schulsprecher) 1명과 최대 3명의 전교 부회장(Stellvertreter)를 선출한다. 학교대표는 한 달에 최대 2회, 각각 2시간씩 수업시간 중 학생위원회를 소집할 수 있다. 학생위원회는 학기 중 2회, 최대 2시간까지 수업시간 중 전교생모임(Schülerversammlung)을 소집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학교운영위원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전교생모임 소집이 가능하다. 눈 여겨볼 만한 점은, 학생위원회에서 학교운영위원회(Schulkonferenz) 의원 4명, 교직원회(Gesamtkonferenz)·교과 협의회(Fachkonferenz)·학부모회(Gesamteltern-vertretung) 자문위원 2명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 교내 모든 의사결정기구에 참여할 수 있고, 특히 학교 최고 의결기구인 학교운영위원회에 교원, 학교장, 학부모 그리고 학생(학생 위원회 임원 4명)이 다함께 모인 가운데 학교의 교육·재정·예산·운영 등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 교내 학생자치활동은 교외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각 지역구 소재 학교의 학교대표들로 구성된 ‘지역구 학생 위원회(Bezirksschülerausschuss)‘와 지역구학생위원회 대표들로 구성된 ‘연방주 학생 위원회(Landesschülerausschuss)’가 설치되어 있고, 각 연방주 학생 위원회 대표들은 국가수준의 ‘연방 학생회의(Bundesschülerkonferenz)’ 구성원이 되어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
베를린의 경우 지역구 학생 위원회 의원 12명이 지역구 학교 자문위원회(Bezirkts chulbeirat) 구성원이 되고, 연방주학생위원회 의원 12명은 연방주 학교 자문 위원회(Landesschulbeirat) 구성원이 된다. 이들은 자문단 자격으로 학생들의 입장과 요구에 근거해 지역구와 연방주(베를린) 차원의 교육정책 및 교육사업 제안과 개선에 직접 의견을 제시하거나 함께 토론하며 의견교환과 정보교환을 하게 된다.
<그림 2> 교외 학생자치활동 구조
독일에서 학생자치활동은 ‘학생공동책임(Schülermitverantwortung, 이하 SMV)’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실현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바이에른주가 있다(법적 근거: 바이에른주 교육·수업법 제62조). SMV는 “학생들이 학교와 수업 운영에 적극 참여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능력(예: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기)을 키우는 것”으로 정의된다. SMV는 학생자치가 몇몇 학생운영회 임원들의 임무가 아니라, 모든 학생이 학교생활에 적극 참여하도록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학교마다 SMV 교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거나 SMV 우편함이 설치되어 있어 학생들은 자신의 요구와 건의사항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SMV는 구체적으로 특수학교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
바이에른주 운터하힝(Unterhaching)에 소재한 테아디엠학교(Thea Diem Schule)는 전교생 약 130명이 재학하는 지적장애 특수학교이다. 테아디엠학교는 SMV를 “아동·청소년이 학교 생활과 학교 축제, 그 외 다양한 학교 프로그램을 함께 계획하고 운영하는 과정”으로 정의하며, SMV를 주요 교육 이념으로 정착시켰다.
테아디엠학교의 SMV 실천 모습은 다음과 같다. 3학년부터 각 반마다 학급대표 2명이 선출된다. 각 학급대표들이 모인 학생위원회에서는 학교대표가 선출된다. 학교대표 선출 전에 교육을 실시하여 학교대표의 역할과 자질 등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투표를 통해 다득점자 3명이 학교대표로 선출되고 학교대표들은 전교생모임 때 공식적으로 소개된다. 일반적으로 학생위원회에서 학교대표 선거가 실시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교생 모두가 선거에 참여하기도 한다. 학교대표는 학교 공식 행사나 안건에 있어 학생들을 대표하고, 나아가 지역학생자치기구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한다.
<그림 3~6> 테아디엠학교의 학생대표선거 관련 교육자료
SMV의 주요 임무로는 학교 공식 행사 및 축제(예: 전교생모임, 여름축제, 학예회, 졸업식) 기획하기, 학생들 분쟁 중재하기, 사회적 행사(예: 학교밴드의 자선공연, 크리스마스 자선행사) 준비하기, 학생들의 요구사항 파악하기(예: 골대를 설치해주세요, 학교에서 영화를 보고 싶어요, 학교 마당에 축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세요), 환경보호 관련 주제 및 아이디어 수집하기(예: 분리수거, World Clean Up Day) 등이 있다.
학급대표와 학교대표들은 학생위원회 지도교사와 정규적으로 모여서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학교장의 동의를 구한 후 행사를 추진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교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관련 사진과 글을 담은 플랜카드나 전단지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학생들은 건의사항이나 희망사항을 그림이나 편지 형태로 작성해 학교 본관에 위치한 SMV 우편함에 투고할 수 있고, 학생위원회는 투고된 안건에 대해 토론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림 7> 테아디엠학교의 학생대표선거 후보자 등록증
사실 테아디엠학교는 2023년 필자가 한국의 어느 교육청 관계자들과 함께 독일 특수교육 연구차 방문한 학교이다. 매우 인상 깊은 체험을 한 학교라 본 글에서 꼭 소개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학교방문을 가면 학교장이 학교소개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테아디엠학교의 경우 교장선생님과 5~6명의 재학생이 우리 탐방팀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학생위원회 임원이기도 한 학생들은 각자 순서에 따라 학교소개를 하면서 학교 주요 공간을 보여주었다. 수줍음과 당당함이 섞인 얼굴의 학생들은 직접 준비한 텍스트를 차분하게 읽어 나가거나 외운 것을 자연스럽게 발표했고, 우리의 질문에도 침착하게 답변했다.
필자는 그동안 수많은 특수학교를 방문했지만, 학생들이 외부 방문객을 이토록 주도적으로 이끄는 모습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학생들이 실수하거나 더듬거려도 옆에서 차분하게 기다리고, 학생들을 끊임없이 격려하고 칭찬하며, 학생들의 눈을 바라보며 경청하고, 학생들 눈높이에서 적극 소통하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본 글 초반의 인용구처럼, 학교는 단순히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적극 체험하고,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 하려면 학교는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의사결정참여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 장애학생 내지 특수교육대상자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필자는 테아디엠학교에서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리고 학교 민주주의의 근본이 교사와 학생 간의 원활한 소통과 깊은 신뢰에 있다는 사실 또한 강렬하게 체험했다.
https://www.smv.bayern.de/mitbestimmen-in-meiner-schule/was-ist-die-smv/
https://www.berlin.de/politische-bildung/publikationen/broschueren/mitbestimmung-und-partizipation-von-grundschueler_innen.pdf
https://www.berlin.de/sen/bildung/schule/gute-schule/mitwirkung-von-schuelern-und-eltern/
https://www.schulgesetz-berlin.de/berlin/schulgesetz.php
https://www.theadiemschule.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