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음악가이자 문화예술 관료였던 박연이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관현맹인의 처우 개선을 강조하며 안정적으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철마다 녹봉을 줄 것을 세종에게 건의하며 했던 말이다.
위 내용은 세종실록에서 전하는 것으로 모든 백성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선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지난 2020년 12월 10일 「장애 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장애예술인지원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장애예술인의 문화예술 활동 지원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여 장애예술인의 문화예술 활동을 촉진하고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이 시행된 지 반년이 훌쩍 지났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문화예술계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장애예술인들의 경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애예술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해 오래전부터 많은 분들이 함께 노력해 왔다.
최근 들어 장애예술인들의 안정적인 예술활동 지원을 위해 문화예술 활동을 일자리로 연계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 축하공연(울산광역시의회 30주년 기념식)
▲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단 연습장면
울산 최초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 채용
최근 필자가 경험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7월 28일, 울산 동강의료재단 동강병원 회의실에서는 특별한 채용식이 있었다.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 4명이 8월 1일부터 동강병원에 채용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발달장애인 일자리 창출 사례가 울산에서는 최초였기에 더욱 특별한 자리이기도 하였다. 채용된 4명은 ‘국제장애인문화교류울산광역시협회’ 소속인 윤성희(플루트), 임현수(더블베이스), 이선희(클라리넷), 조현길(드럼)이다.
“평소 성격이 내성적이라 긴장을 하거나 낯선 환경에 있게 되면 불안한 마음에 같은 행동을 반복해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데요.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 만큼은 불안함도 떨쳐 버릴 수 있고 그런 행동도 안 하게 돼서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성희 씨. “학교 다닐 때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연주하면서 많이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는 현수 씨와 “악기를 연주하고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지기도 했지만, 동강병원에 취업하고 매일 출근을 하면서 요즘은 정서적으로도 많이 안정된 것 같아 저희 부부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라며 활짝 웃으시는 현수 씨의 어머니. 운동을 좋아하고 성격이 엄청 활발하여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는 막내 현길 씨는 합주를 위해 플루트 연주도 새로 시작하였다. 생소한 악기를 다루느라 힘들지만 “좋아하는 연주를 매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선희 씨도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같이 연주하고 있다. 취업이 된 후에 매일 연주 활동을 하면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도 자신감이 생긴 것도 있겠지만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아마 이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기가 있었기에 퇴근 후에도 힘들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부러워만 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다
이들의 취업 과정을 돌아보면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4월 23일에 ‘창원한마음병원 발달장애 예술인 최초 채용’이라는 기사를 접했지만 울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후 6월 17일, ‘병원 로비가 무대, 환자가 관객, 우린 음악 치료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한마음병원에 채용된 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병원 로비에서 매주 공연을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울산에 있는 기업들에게도 모범사례로 소개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 부럽다. 괜히 헛된 꿈만 꾸다 속만 쓰리려나’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국제장애인문화교류울산시협회’를 알게 되어 6월 23일, 미팅을 위해 협회에 도착했더니 그곳에는 어머니 네 분이 함께 앉아 계셨다. 취업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이 진행되지도 않았고, 협회 업무 파악이 되기 전이었기에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또, 장애인 취업을 담당하는 기관인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취업지원부장이 온다고 하니 어머니들께서 희망 가득한 마음으로 나오셨을 것을 알기에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머니들의 간절한 마음 덕분이었을까. 지인의 소개로 이틀 뒤 의무고용사업체인 동강의료재단(동강병원) 이사장과의 미팅이 성사되었고 나는 문화예술 분야 장애인 고용을 제안했다. 이사장님께 창원 한마음병원 오케스트라 창단 공연을 보자고 제안했고, 기꺼이 창원까지 동행해 주셨다. 지역병원으로서는 사례가 없는 새로운 직무로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이기에 많은 고민이 있었을 텐데도, 동강병원에서는 신속하게 채용을 결정하여 8월 1일부터 4명의 단원이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 동강병원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인 (왼쪽부터) 조현길, 윤성희, 이선희, 임현수 씨
우연과 필연이 만나 이루어낸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우연히 보게 된 신문기사, 나에게 도전의 에너지를 전달해 주신 네 분의 어머니들과의 만남, 지인찬스로 얻어진 이사장과의 미팅, 때마침 개최한 창원의 창단 공연, 이 모든 것이 모여 이루어낸 기적이라 생각한다. 현재 채용된 4명은 병원에서 공연도 하고 공연이 없는 날은 협회에서 연주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요즘은 가끔 지역 내 초청공연을 가기도 한다. 10월에는 단원들 전체가 주인공인 ‘2021 장애인사랑예술제’도 개최될 예정이다.
전체 등록장애인 인구는 큰 변동이 없으나 지체장애인 비율은 2003년 56.0%, 2019년 46.7%로 감소하고 있지만, 발달장애인 인구는 2003년 8.1%, 2019년에는 9.2%로 매년 6~7천 명씩 증가하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인구 중 청년 장애인들의 60% 이상이 발달장애인이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 창출은 발달장애인 고용에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로 테마다가오고 있다.
공공기관인 한국전기안전공사에서는 어린이들의 전기안전교육을 위해 ‘발달장애인 전기안전 문화공연단’을 창단했다. 최근 수도권에서는 발달장애인 뮤지컬 극단, 합창단, 연주단, 플로리스트, 화가, 도예가 등 다양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대구에서는 전국 최초 문화예술 중점 특수학교인 ‘대구예아람학교’가 개교하였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는 중증장애인으로 구성된 ‘맑은소리 하모니카앙상블’ 단원을 고용하겠다는 협약도 있었다.
이처럼 발달장애인 문화예술을 통한 일자리 창출 노력들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장애인 의무고용 기업들이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 또한 매우 고무적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지난 6월 18일,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 정성하 씨와 김지희 씨를 장애인고용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정성하 씨는 구독자 672만 명의 유튜버이자 유명한 아티스트이며, 김지희 씨는 발달장애인으로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폐막식 무대에서 연주하였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의 주인공이다. 장애예술인 당사자가 공단의 홍보대사로 위촉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장애인 문화예술 분야의 고용 활성화를 위해 공단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600년 전 세종대왕께서는 장애예술인에게 관직을 내리고 처우개선 등을 위해 세심하게 살피셨다. 600년이 지난 지금 장애예술인지원법이라는 첫걸음을 통해 장애예술인들의 안정적인 문화예술 지원과 더불어 문화예술 분야가 새로운 장애인 일자리로 발전해 나가길 바란다. 세종대왕께 장애예술인의 관직과 처우개선을 건의한 박연과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하는 수많은 분의 적극적인 노력들이 분명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낼 것이라 믿는다.
▲ 울산 최초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 채용식날
- ※ 울산대학교 병원에서도 10월 1일 문화예술 분야 발달장애인 10명을 채용하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