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시간의 결실
고봉현(서울삼성학교 교사)
1994년 이후 최악의 무더위라고 연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올 여름 날씨는 정말 더웠습니다. 특히 8월 들어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린 무더위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그 무더위 속에 전국의 청각장애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들과 함께 했던 75시간의 ‘수어연수’는 더위만큼 제 교직 생활 속에서 오래도록 의미 있게 기억되리라 여겨집니다.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났다.’고 주저 없이 이번 연수를 신청하면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20여년을 넘게 청각장애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나름 어께 너머로 배운 수어였지만 지금껏 아이들과 잘 소통하며 지냈는데, 이제 와서 이 나이에 또 무슨 ‘수어’를 배워야 하는가? 그것도 2주가 훌쩍 넘는 방학이란 꿀 같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정말 수도 없는 고민을 반복했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연수 자체를 취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청각장애학교 교사로 지내오면서 한번쯤은 ‘수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어왔던 터라 두 눈 딱 감고 ‘그래, 듣고 배워서 남 줄까?’ 하며 스스로를 몇 번이고 위로하면서 연수에 참석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 지금은 마음을 한결 뿌듯하게 합니다.
연수 기간 동안 늘 아이들을 가르쳐왔던 교사의 입장에서 그 역할이 뒤바뀐 피교육자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많은 것을 머릿속에 기억했고 가슴에 담았습니다. 그 가운데 교사인 저 자신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미를 더욱 절실하게 되새길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마음을 다해 소통했다고 자부했던 의사소통 방식이 오로지 나만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느꼈던 공허한 대화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수어로 내 뜻을 전하면 무조건 다 알아듣고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도 새삼 느꼈습니다. ‘내가 청각장애인이었다면 건청인 선생님이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조건 전달하고 싶은 말만 수어로 늘어놓았을 때 과연 쉽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를 더듬어 생각해 본 것도 정말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청각장애학생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지금껏 그들의 입장에서 수어를 전달하지 못했던 점이 무척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었던 농문화와 농사회의 특징 등을 직접적으로 농인 강사님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 듣고 우리 아이들을 더욱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각장애학생들의 입장에서 조금 더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늘 노력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그 강사님의 이야기가 지금도 교사인 저를 다독여 주는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앞으로 교육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학하면 학생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수어’를 구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한 수어 소통 능력도 신장해야 되겠고, 수업 시간 마다 수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오면 그것을 또 어떻게 구사해야 할지 고민해야 되고, 나의 국어식 수어 표현이 능숙하게 농식으로 바뀔 수 있을지. 제법 머리 아픈 고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고민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난 90시간의 노력이 제 고민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으리란 생각에 이런 고민은 그저 기우로 여깁니다. 다만 제가 75시간 동안 현장에서 받았던 이 연수가 원격연수나 방문연수로 대체되고 좀 더 짧게 기간을 단축시키는 방안으로 전환 된다면 적어도 열흘이 넘는 방학 시간을 이용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망설임과 고민 때문에 저처럼 몇 날을 가슴앓이 하는 교사가 없을 거라는 제안을 슬쩍 흘려봅니다. 어떤 새로운 제도와 법도 그것을 수용하려는 사람들의 충분한 공감이 있어야 그 효과가 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연수 기간 내내 온전히 연수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배려해 주신 국립특수교육원 원장님을 비롯해 과장님, 연구사님들 덕분에 8월의 무더위를 잘 이겨냈습니다. 늘 뒤에서 챙겨주시고 격려해 주신 그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기에 모두가 연수에 집중할 수 있어 행복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연수에 함께 했던 청각장애학교 선생님들과의 추억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펄펄 끓는 무더위 속에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모두에게 알차고 뜻 깊은 결실이 되었길 바랍니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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